[청년아고라] 참을 수 없는 번역의 무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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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고라] 참을 수 없는 번역의 무거움
  • 하지석 칼럼니스트
  • 승인 2020.11.17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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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믿고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필요하다.
▲하지석 한국청년신문 칼럼니스트
▲하지석 한국청년신문 칼럼니스트

[한국청년신문] 참을 수 없는 것은 비단 존재의 가벼움뿐만이 아니다.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비대면 수업,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에 그어진 수많은 밑줄들, 수련회 셋째날의 점심으로 나온 짜장밥과 같은 것들도 종종 나를 참을 수 없게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학생으로서의 나를 가장 참을 수 없게 하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불친절한 번역물이다. 번역은 참을 수 없이 무겁기 때문이다.

오역의 문제는 생산자의 실수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이를 감내해야 하는 몫은 불특정 다수인 독자들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종종 불친절한 번역을 마주하곤 하는데, 특히 그 번역본이 유일한 역본일 경우, 불명료성의 한 가운데 던져진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만약 영한 번역서를 읽던 중이라면 사정이 조금 낫다. 원전을 참고하는 방식을 통해 불명료함을 그럭저럭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원전이 영어 이외의 언어일 때이다. 그럴 때면, 나는 스스로의 제2외국어 실력을 한탄하며, 또 다른 번역본을 참고하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불명료함'의 역치는 독자들마다 상이할 수 있기에, 이를 전적인 기준으로 삼아 번역의 질을 논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다. 이에 조금은 객관을 지향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보다 본격적인 문제는 전문용어나 문장의 의미 자체를 잘못 번역하는 경우에 발생하게 된다.

오역의 참사가 빚어낸 파급은 때때로 1000년 뒤의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곤 한다. 미켈란젤로가 남겨놓은 '뿔 난' 모세(Moses)상을 떠올려보자. 이 조각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켈란젤로가 활동한 16세기보다 약 1000년 전에 발생한 어떤 오역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4세기에 주로 활동했던 성인 히에로니무스(Saint Jerome)는, 가톨릭 교회의 표준성서였던 불가타(Vulgata)를 집대성한 걸출한 교회학자이기도 했지만,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단어 'קרן(karan)'을 오역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해당 단어가 '뿔'이라는 명사를 의미하기도 했고, 동시에 '빛을 뿜다'라는 동사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비롯된 실수였다. 이는 명백한 오역이었다. 해당 부분에 대해 공식적으로 번역 수정이 이루어진 것은 1979년에 개정된 성서가 출판된 때였으니, 장장 1600년에 달한 해프닝이었다. 나아가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세의 이마 뒤편에 난 뿔을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해프닝은 앞으로도 얼마간은 지속될 것 같다.

뿔의 묘사를 두고 짧지 않은 고민을 했을 미켈란젤로를 떠올리는 것은 내게도 적잖은 위로가 된다. 영어 원전을 대출하기 위해 중앙도서관 계단을 오르는 정도의 수고는 감내할만 한 것이겠구나. 게다가, 사실 히에로니무스의 실수는 딱히 우리를 괴롭히지도 않기에, 이는 그럭저럭 참을 수 있는 무게다. 그러나 세상에는 분명 우리를 괴롭게 하는 번역이 존재하기도 한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는 2018년에 개봉된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오역 논란을 기억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천만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의 시나리오 자체를 오해하게 한 이 사건은, 극중 한 등장인물의 대사인 "We are in the endgame now"의 번역에서 비롯됐다. 번역가는 그 대사를 "이젠 가망이 없어"라고 번역했으나, 그것은 'endgame'이라는 단어가 '최종단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번역이었다. 요컨대 "이제 (드디어) 최종단계야"라는 희망적 발화를 "가망이 없다"로 번역한 것이었으니, 해당 번역은 시나리오의 맥락에서 이탈해버린 셈이었다.

번역물은 2차 저작물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창작으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원저작물이 분명히 존재하기에, 번역 작업은 깊은 이해와 민감한 감수성을 요하는 고된 작업이 된다. 위대한 번역가인 그레고리 라바사(Gregory Rabassa)는 일찍이 자신의 책 <번역을 위한 변명>에서 번역의 어려움에 대해 장난스레 말하지 않았나. "두 개의 자아를 다루는 데서 올지도 모르는 정신분열증의 위기는 온전히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 

번역물과 원저작물의 관계 또한 해묵은 문제이다. 로베르 에스카르피(Robert Escarpit)가 "번역은 반역"일 수 있다고 했듯, 양자 사이의 정체성이 동일한 정도로 지속된다고 확신하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다소 살벌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문장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나, 사실 어느 정도의 답은 정해져있다.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고, 창작에 준하는 고민과 해석이 동반될 때 비로소 번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문 번역가는 장인(meister)이다. 여하튼 번역이 '반역'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면, 또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으로 '반역'이 될 수밖에 없다면, 나는 잠시 맹자의 일화를 끌어들여옴으로써 번역을 위한 변명을 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천하를 주유하던 맹자는 어느날 제나라에 들르게 된다. 융숭한 대접 속에서 올바른 다스림에 대한 여러 물음이 오가던 중, 제선왕이 맹자께 묻는다. 반역이 정당한 것입니까? 이에 맹자는 정당한 반역을 인정한다는 취지의 답을 한다(賊仁者謂之賊, 賊義者謂之殘, 殘賊之人謂之一夫.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 요컨대 인(仁)과 의(義)가 훼손되고 가치의 본말이 전도되는 혼란한 상황에서의 반역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번역 또한 필연적으로 반역일 수밖에 없다면, 일단 정당한 반(번)역에 한해서는 환영한다고 해두자. 곧 펼칠 다른 책의 번(반)역도 부디 정당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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