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아고라]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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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고라]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들기
  • 홍수빈 칼럼니스트
  • 승인 2020.11.2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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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빈 한국청년신문 칼럼니스트
▲홍수빈 한국청년신문 칼럼니스트

[한국청년신문] '예능을 다큐멘터리로 본다',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든다'라는 말이 있다. 이런 말들에는 농담으로 한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상대방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시선이 기저 한다. 이들은 자신의 농담에 정색으로 대꾸해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비난하지만 그 농담을 듣고 차마 웃을 수 없었던 상대의 기분은 고려하지 않는다.

국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촉구하며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프로젝트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이나 SNS에서 농담으로 썼던 단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코로나19 동안 체중이 증가한 사람들을 뜻하는 '확찐자'나 답답하거나 화가 나는 상황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던 '암 걸릴 것 같다', 어린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돼 어떤 일에 초보인 사람을 지칭하는 '린이'는 대중 매체에도 등장할 만큼 우리 삶에 깊숙이 침투된 단어들이다. 농담 삼아 쓰던 어휘들이 차별적 용어 사례로 등장한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긴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일상적인 언어들이 왜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일의 일례로 쓰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프로젝트는 일종의 데페이즈망 효과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일상적인 사물을 크게 확대하거나 엉뚱한 곳에 배열해 놓음으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이질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활용했다. 데페이즈망 기법이 투영된 사물들은 일상에서 끄집어져 나와 감상자가 사물의 존재를 재관찰하고 숙고할 기회를 부여한다. 그러나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프로젝트의 데페이즈망은 사물들을 엉뚱한 곳에 배치한 데페이즈망이 아니라 원래 있어야 했던 자리로 돌려보낸 데페이즈망이다.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프로젝트가 주는 이질감은 일상적으로 쓰던 단어들의 의미를 재고한 후 농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주는 데페이즈망이어야 한다.

유행어는 우리의 국어 생활을 편리하게 해준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다 보니 체중이 증가했어''확찐자'로 표현하면 되고 '나는 요리를 잘 못 해'라는 말은 '나 요린이야'로 일축된다. 어떻게 보면 경제적인 국어 생활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유행어는 재치 있기까지 하다. 확진자를 소리 나는 대로 발음하면 '확찐자'가 된다. 이 사실에서 '확 살이 찐 자'라는 의미를 이끌어 낸 센스에는 감탄이 나온다. 재치 있는 언어유희는 우리에게 웃음을 주기도 한다.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프로젝트에 참여한 황선우 작가는 <웃을 수 없는 농담>이란 글에서 '확찐자'라는 단어에 깔린 오만함을 지적한다. "생명의 위협이나 고통스러운 후유증, 생계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는 사람이라면 감염병 확진을 절대 농담거리로 삼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진을 받고 사망에 이른 사람이 120만명을 넘긴 지구적 재난의 심각성을 희석하는 농담은 부적절하다"라고 황선우 작가는 말한다. 웃음에는 고통을 지우는 힘이 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군가 재밌는 농담을 해주면 한순간 슬픔을 잊을 수 있다. 농담이 풍자가 될 때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웃음은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사회 참여의 한 형태로 다가온다. '확찐자''암 걸릴 것 같다', '린이'라는 표현이 주는 웃음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사회의 부조리를 통렬하게 비판하지도 않고 배제와 편견을 조장해 불편한 웃음을 줄 뿐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고통을 아파하고 공감해 주는 인내심이 아니라 고통을 지우는 성급함에서 기인한다. '암 걸릴 것 같다'라는 표현은 '확찐자'가 코로나19로 건강과 생계에 타격을 입은 사람들을 간과하듯이 실제 암 환자가 겪는 고통을 축소하는 말이다. 어떤 일에 초보인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린이'는 어린이 개개인의 특성과 성격을 존중하지 않고 미숙한 존재로만 바라보는 시선이 드러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유행어 중에는 현실에 있는 사회 구성원의 존재를 소외시키기는 말들이 있다.

누군가의 고통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자 존재를 이루는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나의 웃음이 타인의 아픔을 희화화한 농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웃음은 타인의 고통을 줄여주기는커녕 고통의 주체를 희미해지게 할 뿐이다. 농담으로 한 말에 예민하게 구는 사람들의 정색은 정체성을 공격받았을 때 지을 수 있는 표정 중에서 가장 온화한 표정일지도 모른다.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이유는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먼저 사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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