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아고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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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고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 조은서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1.04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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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
▲조은서 칼럼니스트
▲조은서 한국청년신문 칼럼니스트

[한국청년신문] 우리가 영화를 보는 행위는 일종의 ‘타인이 되는 경험’이다. 히어로 무비를 보며 우리는 스스로 ‘영웅’ 되었다가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을 보며 ‘비운의 여주인공’이 되었다가 범죄 영화를 보며 ‘사건의 목격자’가 되기도 한다. 내가 아닌 타인이 되어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떠할까?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는 이러한 질문을 구체적이고 물질적으로 묘사해 낸다.

영화 속 주인공인 크레이그는 가난한 인형술사이다. 인형술사라는 크레이그의 직업은 내가 아닌 타인의 삶을 신처럼 지배하고픈 소시민적 욕망의 뒤틀린 발현이라 볼 수 있다. 그의 욕망은 ‘존 말코비치’라는 타인이 되는 영화의 전체 이야기와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크레이그의 인형극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가난에 시달리다 돈을 벌기 위해 7과 8층 사이에 위치한 7과 1/2층의 레스터 회사에 들어가게 된다. 1/2층인 이 회사는 고개를 제대로 들고 다니지도 못하는 천장이 낮은 회사로 그려진다. 이 회사에서 서류 정리 하는 일을 맡은 크레이그는 어느 날 캐비닛 뒤쪽에 떨어진 서류를 꺼내려고 캐비닛을 치우다 조그마한 문을 발견한다. 그 문을 열고 통로로 들어가자 크레이그는 존 말코비치가 되어 그의 의식 안에서 ‘그’가 된다.

이 영화는 본인 시점으로 보는 현실의 삶과, 타인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 존 말코비치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으로 이원적 세계가 공존한다. 이러한 이원적 세계를 나누고 환상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관문은 7과 1/2층에 있는 낡고 조그만 통로이다. 이 통로로 들어가면 어떠한 사람이건 15분 동안 ‘존 말코비치’가 되어서 그의 시점으로 모든 것을 보고 체험할 수 있다. 영화에서 문, 통로는 각자의 욕망이나 욕동을 말코비치라는 타인에게 강요하는 수단을 상징하고 있다. 판타지 장르에서 말하는 환상의 세계는 이 영화에서 존 말코비치의 의식으로 들어간 세계를 뜻한다. 그 시점에서 본다면 현실과는 전혀 다른 규칙으로 15분 동안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의식으로 세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존 말코비치의 몸’은 현실의 도피처인 동시에 일종의 가상현실이 되면서, 욕망을 분출하는 곳으로 나타난다.

말코비치의 의식 안으로 들어가 크레이그, 그리고 그의 부인 나티는 각각 자신의 욕망을 표출한다. 크레이그는 말코비치의 명성을 이용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인형극을 널리 알리게 되고, 나티는 자신도 몰랐던 성 정체성을 찾아 잠시나마 남성이 되어 새로운 육체적 판타지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렇듯, 영화에서 말코비치는 그렇게 사람들이 각각의 욕망을 외부 투사하는 대상으로서 환상세계를 체험하게 해주는 매개체이자 주체가 된다. 이러한 환상세계 안에서 15분을 넘어 계속 말코비치를 지배할 수 있게 된 크레이그는 위대한 배우의 삶을 소유하는 듯 했으나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채 그 의식 속에서 나오게 된다. 자기 자신을 폐쇠적인 감옥으로 부터 탈출시켜 신세계를 꿈꾸게 했던 말코비치의 의식은 결국 도가 지나쳐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고 자신마저 파괴되고 만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는 실제 존재하는 물리적 구멍을 통한 ‘타인이 되는 과정’이 억눌린 자아의 왜곡된 망상으로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늘 누군가를 동경하고 부러워하면서 살아가지만 평생 내가 아닌 다른 누구인 채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존 말코비치 되기>는 이러한 우리의 욕망이 담긴 엉뚱한 상상을 실현시켜준 판타지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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