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아고라] I can do this all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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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고라] I can do this all day
  • 최원석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2.22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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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한국청년신문 칼럼니스트
▲최원석 한국청년신문 칼럼니스트

[한국청년신문] 마블의 영화 속 스티브 로저스는 우리를 설레게 한다. 진정 우리가 원하는 리더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 리더라면 믿고 따를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리더십은 강철 같은 육체나 2차 세계대전 참전 경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강할 때나 약할 때나, 유리할 때나 불리할 때나, 신의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는 불의와 맞서면서, 혹은 자신이 믿는 대의를 위해 싸우면서 이렇게 말한다. “I can do this all day.” 신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굳건함만으로 그는 훌륭한 리더다. 개인적으로 영화 <시빌 워>에서는 그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저 대사를 뱉는 스티브 로저스는 존경할 만 했다.

지난 15일, 민주당 우상호 서울시장 후보는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만하시죠. 제가 충분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게 우리의 캡틴을 자처하는 정치인의 현주소이다. 아무리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지만, ‘온종일 할 수 있다’는 이와 ‘그만하자’는 이의 간극을 얼마나 큰가. 이 발언은 지난 10일 우상호 후보가 자칭 “박원순 전 시장의 유가족을 위로하는 글”에서 시작됐다. 그는 글에서 “박원순이 우상호고 우상호가 박원순”이라며 박 전 시장을 계승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여러 비판이 있었고, 김현정은 우 후보에게 경위와 사과 의사 등을 묻고 있었다. 우 후보는 피해자는 지원하지만 박 전 시장은 계승하겠다는 모호한 답변을 내놓다가, 이내 그만하자고 했다.

그의 발언은 2차 가해였다. 김현정의 말마따나 정말 유가족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면, 사적으로 전달해도 됐을 일이다. 정치인이, 그것도 후보 경선기간에, 그런 메시지를 낸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는 본인이 더 잘 알 것이다. 정치는 메시지를 다루는 작업이다. 본인 의도와 무관하게, 어떻게 읽힐지가 뻔한 상황이다. 왜 2차 가해인지, 인권 측면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굳이 밝히지 않겠다. 그보다는 그 문제의 발언, “그만하시죠. 제가 충분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에 집중해보자. 단지 두 문장뿐이지만, 그 문장들이 모두 문제다.

“그만하시죠.” 발언의 시비와 무관하게 비겁하다. 공개적으로 그런 발언을 한 의도가 있었다면 상세히 설명하면 될 일이다. 유가족을 향한 위로를 사회적으로 환기하고 싶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면, 동의하지는 않을지언정 추하지는 않았을 테다. 혹은 정말 ‘울컥하는 마음’에 그랬다면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면 될 일이다. 용서하지는 않을지언정 이해는 했을 테다. 그는 처음부터 피해자도 지원하고 박 전 시장도 계승하겠다는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더니, 급기야 그만하자고 했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는 “정치인은 이슈보다도 그걸 다루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 후보의 태도는 당당하지 못했다. 최선은 생각이 짧았다며 깔끔하게 사과하는 것이었고, 차악은 자기 의도를 절절하게 설명하며 나름의 신념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의 선택은 최악이었다.

발언은 정치적이고, 목소리는 곧 권력이다. 안건에 대해 말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힘이다. 시장 후보를 자처하는 정치인이 언론의 검증을 받는 시간에 질문을 막았다. 자신에게 불리한 걸 회피하는 걸 너머, 주체적으로 발언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소수정당의 초보 정치인이 그럴 수 있었을까. 중년 남성의 민주당 4선 의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민주당은 지금 권력 행사에 극도로 민감해야 할 시기다. 이번 선거의 원인이 일방적 권력 행사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만하시죠”는 결코 민주적인 리더의 인상을 주지 않는다.

“제가 충분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오만하다. 충분의 여부는 본인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그 질문을 던지고 납득할 만한 답을 기다리고 있는 언론인이 판단할 몫이며, 더 크게는 박 전 시장의 피해자가 판단할 몫이다. 실수 혹은 과오에 대한 질책은 어디까지가 충분한가. 어려운 문제이다. 법치와 피해자 회복의 중간쯤 있을 것이다. 어쨌든 분명한 건 거기에 가해자의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일본은 위안부 사죄는 충분할까. 대부분의 국민들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고이즈미 담화 등에서 일본은 사죄와 유감을 표했다. 일본은 충분히 사죄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김현정이 우 후보에게 질문을 계속한 이유 역시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언론인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는데, 그걸 듣고 있는 유권자나 피해자가 충분하다고 느낄 리 없다. 거기에 대고 본인이 충분하다고 한다면 그 뜻은 하나다. “이것에 관해 말하기 싫다. 나한테 불리하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워한다.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유불리를 떠나 자신의 신념을 지켰기 때문이다.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고려 없이 쌈닭처럼 싸웠다. 그래서 그를 바보라고 불렀다. 한국의 스티브 로저스였다. 왜소한 몸으로 두드려 맞으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물러서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의 후예를 자처하는 정당과 정치인이라면 생각해보길 바란다. 유불리 따져가며 때로는 고압적이고 때로는 자기중심적인 인물의 매력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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