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아고라] 세이렌의 노래를 향유하려는 오디세우스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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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고라] 세이렌의 노래를 향유하려는 오디세우스들에게
  • 홍수빈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2.22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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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빈 한국청년신문 칼럼니스트
▲홍수빈 한국청년신문 칼럼니스트

[한국청년신문]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해 배를 난파시키거나 자살을 종용하기로 악명높은 신화 속 님프다.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군이 승리를 거두는 데 큰 공을 세운 오디세우스는 키르케에게서 세이렌의 유혹을 무찌를 묘책을 전수받는다. 그 묘책이란 귓속에 밀랍을 넣어 외부 소리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래가 내심 궁금했던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에게만 귓속에 밀랍을 넣으라고 이른 뒤 자신을 뱃기둥에 단단히 묶어둘 것을 지시한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은 오디세우스는 밧줄을 풀라고 소리 질렀지만 귓속에 밀랍을 넣어 둔 부하들은 세이렌의 목소리와 더불어 그의 명령도 들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오디세우스는 부하들과 안전하게 바다를 건널 수 있었고 세이렌의 노래에 대한 그의 미적 호기심도 해결할 수 있었다.

세이렌의 노래를 궁금해했던 오디세우스의 호기심은 과연 영웅다운 대담함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름다운 예술에 경외심을 갖고 그것을 향유하려 하는 욕심은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이기도 하다. 의식주를 모두 충족시킨 인간의 마음에서는 여유가 우러나온다. 그런 여유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생을 되돌아보고 삶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망을 갖게 된다. 예술은 이러한 인간의 욕망대로 삶을 더욱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아름다운 예술은 삶에 대한 사랑을 고취하고 인간의 가치를 고민함으로써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술이 가치있는 이유 중 하나는 예술이 행사하는 사회적 영향력이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의 가치를 판단할 때 예술의 외적인 요소, 즉 작품의 사회적 기여도를 고려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예술에 있어서 표현의 자유가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중세시대 때 그림은 신의 위대함을 찬양하기 위한 도구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선전을 위한 영화가 제작되었고 많은 책이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에 반한다는 이유로 불온서적의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예술이 얼마나 세상에 이바지하는지에 대해 논하는 일은 예술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회가 주류 담론과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예술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예술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역으로 예술은 언제나 사회를 이용한다. 어떤 창작물도 순수한 창조일 수 없다. 창작물은 작가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으로부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종합한 영감의 실체이다. 이때 창작자가 영감을 얻기 위해 관찰하는 것이 사람들이 바쁘게 모여 사는 이 사회이다. 예술에는 그것을 탄생시킨 예술가가 사회에 어떤 면을 주목하고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느꼈는지에 대한 일종의 진술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은 세상의 유일한 사실에 대한 표상이 아닌 창작자가 주관적으로 느끼고 해석한 진리의 표상이다.

예술은 그것의 창작자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저마다의 대답이고 그것을 세상에 공표한다는 점에서 소통이다. 그런데 예술이 말하고 있는 세상이 사회의 가치, 사회 구성원들이 동의한 윤리관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통의 불발이 된다. 예술은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만약 예술이 자유가 아닌 방종이 된다면 그 예술은 세상의 진리를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집과 독선이 되며 그러한 예술이 건네는 메시지는 세상과의 성숙한 토론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예술은 모든 가치 판단에 우선하여 예술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니체는 다음과 같이 일축한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해석이며, 해석인 한에서 언제나 인간의 힘과 삶에의 의지가 규제적 원리로 작용한다. 또 그런 한에서 언제나 인간의 삶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예술가가 도덕적, 윤리적인 결함을 가진 범죄자일 때 그들의 작품을 소비해도 되느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것 같다. 범죄자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술은 예술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예술을 평가할 때 창작자의 인품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술의 가치는 그것이 얼마나 사람들의 심금에 울림을 주는지, 그것이 얼마나 심미성을 갖는지로 판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술은 결코 창작자와 단절 지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창작자의 성품과 관계없이 예술은 아름답기만 하면 된다는 관점은 범죄를 저지른 예술가와 피해자 사이에서 피해자를 외면하고 예술가의 편에 서는 일과 같다. 범죄자의 작품이 흥행하고 피해자의 목소리는 작품에 가려지는 일은 아름답지 않다. 범죄자의 작품을 불매하고 지양하는 일은 옳고 그른 문제에서 옳음을 추구하는 일이며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예술을 감상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은 저 오디세우스의 마음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의 문제는 수많은 선원들의 목숨을 앗아간 세이렌의 노래를 향유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이렌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정의가 아니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그것의 사회적 역할에서 기원한다. 예술이 인간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삶에 의미를 불어넣는 역할을 수행하기에 아름다운 한 세이렌의 노래가 파괴한 것은 오디세우스의 생명이 아니라 그의 인간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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