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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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가?
  • 장하늘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3.3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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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사울의 아들' 리뷰
▲ 한국청년신문 장하늘 칼럼니스트
▲ 한국청년신문 장하늘 칼럼니스트

[한국청년신문] 이미 그곳의 야만성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듯한 표정을 한 주인공. 그는 존 더 코만도, 사울이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시체를 처리하던 사울은 무언가를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어린 아이의 주검이었고, 이를 계기로 사울은 유대교의 교리에 따라 아들의 장례를 치뤄 주기로 결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랍비라는 유대교 사제가 필요하고, 그는 그의 아들을 위해 기도해 줄 랍비를 찾아 나서면서 그렇게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는 단순한 스토리 라인에 비해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를 그려낸다. 영화를 재생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불편함과 답답함을 느꼈다. 처음에는 티브이 송출 화면이 잘려 나오는 줄 알았다. 감독은 4:3 화면 비율을 책정해,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위태로운 절멸의 공간에 관객을 초대한다. 그리고 관객은 영화라는 미디어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홀로코스트의 비극과 마주하게 된다.

기존의 홀로코스트 영화의 표현 방식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나치의 광적인 반유대주의를 묘사해 내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어떤 경우에는 굳이 필요하지 않은 장면까지 삽입해 불행 포르노 그 자체를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 사울의 아들 감독 라즐로 네메스는 아웃 포커스 기법을 활용하여 최소한의 것만 드러낸다. 또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하면서 주인공이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관객 또한 직관할 수 없게 장치한다. 

결말에 반드시 유대인 해방을 그려내는 것도 홀로코스트 영화의 클리셰로 작용한다. 이 모든 것을 배제한 감독은 여타 홀로코스트 영화와는 달리 생존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사울이 다른 수용자들처럼 해방되어 자유로운 일상을 만끽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감독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그는 비극을 통한 메시지에 집중하고, 그 누구도 영웅으로 그려내지 않는 동시에 악행의 민낯을 재현하는 것을 피했다고 한다. 그의 홀로코스트 영화 철학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감독이 활용한 촬영 기법 만큼이나 유의미하게 관찰해야 할 부분은 영화 속 스토리 라인에 대해 검토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필자가 본문을 시작하며 적어 내려간 첫 문단 속, 의미를 유추할 수 없는 단어가 여럿 있었을 것이다. 존 더 코만도는 무엇이며, 랍비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의 행동이 납득이 되는가? 

일단 첫 번째 의문부터 해결해 보겠다. 존 더 코만도는 수용소 내의 비밀 시체 처리반이다. 그들에게는 다른 수용자들과는 달리 좋은 음식이 제공되었으나, 그들 역시 3개월을 채 살지 못하고 처형되는 시한부 인생이었다. 나치는 그런 그들을 일반 수용자들과 헷갈리지 않고 바로 알아챌 수 있도록 일종의 표시를 조치한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내내 사울의 등 뒤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빨간 X자 표시이다. 수용소 내에서 죽음과 가장 가까이 존재한 것은 존 더 코만도들이었다. 그들 등 뒤에 표시된 X자는 어쩌면 그들의 존재를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그저 '시체 처리반'에 불과한 것으로 옭아매지 않았을까. 나치가 수용자들을 '토막'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 랍비란 도대체 누구인가? 랍비가 뭐길래 주인공이 존 더 코만도의 제1목표에 방해가 되면서까지 혈안이 되어 찾아다닌 것일까. 유대교 장례 전통에 의하면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카디쉬(Kaddish)'를 암송해야 하는데, 이때 카디쉬를 암송해 줄 인물이 바로 '랍비'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행동이 납득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확정적인 답변을 달아두지 않겠다. 사울은 '폭동'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는 존 더 코만도들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아들을 위한 장례식을 준비하는 데만 몰두한다. 이러한 그의 행동을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양심의 발현이라고 보고, 그의 행동을 상징적으로 여겨야 할까? 아니면 사울의 동료들에 이입해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용서하지 말아야 할까? 관객은 딜레마에 빠진다. 그의 행동은 반드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이나, 그는 폭동에 필요한 중요한 화약을 잃어버린 작자이다. 어떤 측면으로 볼 때는 '민폐'에 가깝다. 비유대인의 관점으로 볼 때, 사울의 행동은 영락없이 일을 방해하는 골칫덩어리로 전락한다. 그럼에도 동료들은 사울을 '힘껏' 뜯어 말리지 않는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나는 그들이 여전히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후반부에서 나오는 '우리는 예전에 죽었어.'처럼 그들의 감각과 정신 세계는 수용소에 들어오면서부터 소멸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고, 산 자를 애틋해하는 것은 인간의 너무나도 당연한 도리이지 않은가? 그런 내적 목소리의 외침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들은, 그리고 사울은 '랍비'를 찾아야 한다는 삶의 목표에 의해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울에게 '랍비'는, 그리고 아들의 장례식은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음의 유일한 증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우리는 사울의 행동을 통해 인간 절멸의 공간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 내적 목소리에 대한 희망을 발견한다. '아들의 장례'라는 일시적인 생존 이유를 찾은 사울은 잠시나마 수용소 내에서의 고통을 잊고 앞으로 나아간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저자 빅터 프랭클의 말처럼 인간의 존재 가치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에 달려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여러 가지의 궁금증을 안고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지난 관객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2시간이 조금 안 되는 러닝 타임 동안 한 번도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던 사울이 오두막에서 한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는 미소짓기 때문이다. 일단 해당 장면의 전후 상황을 살펴 보겠다. 

사울은 어린 아들의 주검이 부검당하지 않게 묻어 주려고 했지만, 뒤쫓아오는 나치를 피하려다가 강물에서 아이를 놓치게 된다. 아이의 주검은 종착지를 알지 못한 채, 물에 떠서 어디론가 흘러간다. 아이를 놓치고 허우적거리는 사울을 구한 것은 같이 탈출한 동료였고, 사울은 그 동료를 따라 오두막으로 향한다. 이때 사울은 문쪽을 응시하다 한 아이와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물음표 그 자체인 미소를 띄우고, 사울의 시점으로만 전개되던 영화가 갑작스레 아이에게로 넘어간다. 아이의 뜀박질 소리 뒤로 울리는 총성만이 사울의 운명을, 영화의 결말을 예상케 한다. 

영화에는 두 명의 아이가 나온다. 초반에 나온 주검이 되어 버린 아이와 사울의 미소를 유발했던 아이. 그중에서 후자에 소개된 아이의 존재와 상징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 그 아이는 누구일까? 어떤 사람은 주검이 되어 버린 아이와 마지막에 나온 아이가 동일 인물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몇 가지의 반박으로 쉽게 무너진다. 마지막에 아이가 등장했을 때, 처음으로 화사한 색감이 영화에 표현된다. 또한, 사울의 뒤로 포커스 아웃 된 사람들은 그 아이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차라리 죽은 아이의 환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일리 있을지도 모른다. 

이에 어떤 이들은 죽은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일 것이라고 반론한다. 그리고 그 아이가 사울을 함정에 빠뜨려 죽인 것이라고 말한다. 필자 역시 이 부분에 동의한다. 아이는 웃는 사울과 눈이 마주치고는 이내 달아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는 나치에 의해 저지되는데, 이 장면 또한 상당히 부자연스럽다. 그 아이가 유대인이라면 틀림없이 총에 맞아 즉사했을 터인데, 나치군은 오히려 아이의 입을 틀어막고 금세 놔 준다. 그리고 그 아이의 뜀박질 뒤로 총성이 울려 퍼진다. 

이외에도 영화는 여러 생각거리와 의문을 남기며 끝난다. 본문에서 제시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는 영화를 보며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사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심지어는 사울의 아들이 맞는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울의 이름을 기억함으로써 영화를 기억하고, 홀로코스트의 아픔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감독이 의도한 최고 가치일 것이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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